이슈! 재미있겠다^^ 헐 대박@! 2020년! 변 너무 좋은데?두경승 보면놀랄걸?

2020. 10. 18. 08:02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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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황주(黃州) ·원주(原州) ·장연(長淵)의 3본입니다.
이밖에도 가은(加恩:聞慶) ·전주(全州) 등 여러 본이 전하지만, 동일 연원의 분파로서 현재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송 ·원대(宋元代)의 귀화 성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주 변씨의 시조 변려(邊呂)는 원래 중국 농서(隴西)지방에 살다가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와서 황해도 취성(取城:黃州)에 살았습니다고 합니다.
원주변씨의 시조는 송나라가 망한 뒤 원나라의 심양로천호(瀋陽路千戶)를 지낸 순(順)입니다.
그는 여의 후손이라고 전하지만, 사실상의 시조는 순의 손자인 안열(安烈)입니다.
그는 원나라의 병부상서로서, 고려 공민왕 때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원주를 본관으로 받았습니다.
안열은 고려에 들어온 뒤 홍건적을 격퇴하고 왜구를 무찔러 큰 공을 세웠으나,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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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경승(杜景升)은 전주(全州 :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만경현(萬頃縣 :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사람입니다.
천품이 후덕하고 겉으로 꾸미는 일이 적었으며 용력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공학군(控鶴軍)1)에 들어가자 수박(手搏)2)하는 사람들이 그를 불러다가 한 부대에 편입시켰다.
장인인 상장군 문유보(文儒寶)3)가 그 소문을 듣더니 “수박이란 천한 기예로 장사가 할 일이 아니다.
”고 반대해 두경승은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뒤에 대정(隊正)을 지내다가 후덕전(厚德殿)의 견룡군(牽龍軍)4)으로 들어갔다.
정중부(鄭仲夫)의 변란 때 무인들이 남의 재산을 많이 약탈하였으나, 두경승 혼자 대궐 문을 떠나지 않았고 남의 재물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습니다.
명종 초에 다시 산원(散員)으로 옮겼는데 이의방(李義方)이 그의 이름을 듣고, 데려다가 내순검군지유(內巡檢軍指諭)로 삼았습니다.
하루는 퇴근길에 태안문(泰安門)5)을 걸어 나온 다음 옷을 바꿔 입고 도망쳐 숨어버렸다.
집안사람들이 사흘 동안 찾아다니다가 북산(北山) 바위 틈에서 발견하고 연유를 물었더니,“그저께 숙직을 합니다가 꿈을 꾸는 것 같이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여러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하기에 무서운 나머지 변복하고 숨었는데, 잠시 후 수 만 명이 나를 쫓아오므로 여기까지 도망해 왔다.
”고 말했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경인년(의종 24년, 1170)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재앙을 내린 게다.
”라고들 말했습니다.
이의방은 두경승이 다시 출근했습니다는 말을 듣고, “이런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고 기뻐하여 다시 지유로 임명했습니다가 낭장(郎將)으로 승진시켰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반란을 일으키자 남쪽지방도 모두 호응하므로, 이의방은 그의 종형인 낭장(郎將) 이춘부(李椿夫)와 두경승을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삼았습니다.
이춘부가 성품이 포학하여 고을의 수령들을 많이 죽이자, 두경승이 조용히 타일렀다.
“반란을 평정하라는 명을 받던 때에는 여러 지역의 진들이 반역을 도모하고 주·군들도 호응하여 화란이 계속되므로 평정이 어려우리라 걱정했는데, 지금 공의 신령스런 위세에 힘입어 괴수가 이미 섬멸되고, 우리 군사의 소문만 듣고도 저항을 포기한 채 항복을 청하고 있소.
이미 적도들을 많이 처단했으니 지금부터는 모두 관대하게 처분하고, 만약 반역의 정황이 있습니다 하더라도 그 실상이 명백히 드러난 이후에 처형하는 것이 옳소.
”이춘부가 그 말대로 하니 남쪽 지방 백성들이 기뻐하며 복속해왔다.
선유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이춘부가 두경승더러,“애초에 공을 용렬하고 비겁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그대의 관후함과 신중함 덕분에 큰 일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소.
지난번 공의 계책이 아니었더라면 반역이 그치지 않았을 것이며, 나 자신도 의롭지 못한 인간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을 것이오.
”라 칭송했으며,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생사를 같이하는 우정[刎頸交6)]을 맺게 되었다.
두경승은 이 때 세운 전공으로 장군이 되었고,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나가 창주(昌州 :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군)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켜 분도장군(分道將軍) 박존위(朴存偉)7)·이언공(李彦功) 등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때 두경승이 거느린 수병(戍兵)들이 귀경합니다가 향산동(香山洞) 통로역(通路驛)8)에서 서경 군사들과 조우해 그들을 패퇴시켰다.
두경승이 무주(撫州 : 지금의 평안북도 녕변군의 객관)에 도착해 점심을 먹는데 서경 군사 1천여 명이 들이닥쳤다.
두경승이 객관의 문을 열자 서경 군사들이 마구 난입해오므로 두경승이 한 명을 쏘아 그 자리에서 거꾸러뜨리니 서경 군사들이 패주했습니다.
두경승은 병사들에게 “적도들이 앞에 있으니 옛길로 가면 안됩니다.
”고 이른 뒤, 밤을 틈타 지름길로 가다가 어느 사원에 도착해 안장을 풀고 휴식을 취했습니다.
승려에게 길을 물어 그가 가르쳐 준대로 밤낮으로 행군하여 여드레 만에 개경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원수(元帥) 윤인첨(尹鱗瞻)이 이끄는 군사들이 출전하므로 왕은 두경승을 동로가발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로 임명했습니다.
두경승은 병사 5천여 명을 이끌고 고산(孤山)에 이르러 부대를 셋으로 나눈 다음 좌익과 우익으로써 서경 군사들을 급습해 1천여 명을 목 베었다.
의주(宜州 : 지금의 강원도 문천시 덕원)에 당도해보니 조위총의 장수 김박승(金朴升)이 성 밖에 수레를 늘어놓고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두경승이 정예병으로 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후 사로잡은 김박승의 목을 베어 머리를 개경으로 보냈습니다.
여러 주와 진(鎭)9)이 차츰 귀순해 왔으나 정주(定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장주(長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 및 선덕진(宣德鎭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선덕면)만은 여진(女眞)에 투항하려 하기에 두경승이 사람을 보내어 설득시켰다.
여진 사람 1천여 명이 정주 성문밖에 와서 위급함을 틈타 약탈을 자행하려 하기에 두경승이 설득하자 곧 물러갔다.
맹주(孟州 : 지금의 평안남도 맹산군)에 당도하자 서경 군사들이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항거하였습니다.
이의민(李義旼)·석린(石麟) 등과 합세해 격파한 후 4백 명을 죽이니 맹주·덕주(德州 : 지금의 평안남도 덕천시) 병사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두경승이 주민들을 위로하고 편안히 살게 하였습니다.
무주가 굳게 항거하며 항복하지 않고, 여기에 운중도(雲中道)10) 군사들이 합류해 서로 성원하므로 두경승이 부대를 나누어 공격하니 운중도 군사들은 퇴각해버리고 무주는 마침내 항복하였습니다.
당시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와 네 총관(摠管)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개경으로 돌아오는데 서경 군사들이 길을 차단했습니다.
두경승이 대동강(大同江)에서 요격해 모두 스무 번 싸워 다 이겼고, 서경 군사들은 대패했습니다.
두경승이 귀경길에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에 이르자 왕이 지주사(知奏事) 이광정(李光挺)을 보내 성 밖에서 맞아 위문하게 했습니다.
개경에 도착하니 왕이,“경은 나라에 몸을 바쳐 흉악한 무리들의 기세를 꺾었으니 공이 적지 않다.
그러나 반역의 수괴가 아직 살아 있으니 이는 사직의 수치다.
그대가 힘써주기 바란다.
”고 격려한 뒤, 후군총관사(後軍惣管使)로 임명하여 다시 전장으로 보냈습니다.
두경승이 철관(鐵關 : 지금의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 경계에 있는 철령)을 넘어 요덕로(耀德路)11)·운중로(雲中路)를 따라 진군하니 이르는 곳마다 적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패퇴했습니다.
서경 군사들이 연주(漣州 :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시)로 들어가 웅거하자 성 밖에 흙을 높이 쌓아 그 위에 대포를 벌여 놓고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의주도령(義州都領)12) 최경약(崔敬若) 및 영유(令猷)·영영(令英) 등의 목을 베었다.
사졸들이 성으로 들어가 재화와 보물을 약탈하자 두경승이 군령을 내려 금지시키고, 가마솥을 가져가는 것만 허락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서북지역의 모든 성이 관군을 맞아들여 항복해왔고 관군은 서경으로 진격하면서 계속 적도들을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서경 사람들은 성의 견고함을 믿고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군중(軍中)에서 연주에서 가져온 가마솥을 취사도구로 삼으니, 사람들이 이를 편리하게 사용하며, “공의 계책이 참으로 원대합니다.
”고 칭송하였습니다.
서경 군사들이 야간에 아군을 급습해 영문(營門)을 불태우자, 두경승은 “이미 불이 붙었으니 그대로 내버려두라.
”고 하고는 오히려 남은 기물들을 불 속으로 던져 넣게 했습니다.
불길이 치솟아 낮과 같이 환해지자 서경 군사들이 감히 군영 안으로 침입하지 못하였습니다.
두경승은 평소 은덕과 신망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서경 사람들이 성에서 나와 투항해 왔다.
이에 윤인첨과 합세해 서경을 격파하고 조위총을 잡아서 죽이니 드디어 서경이 평정되었다.
그러나 잔적들이 아직 남아있으므로 왕은 두경승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임명하여 영청현(永淸縣 : 지금의 남포직할시 룡강군)을 진압하게 했습니다.
이 때 북로처치사(北路處置使) 이경백(李景伯)13)이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려고 기병 5백명을 보내 두경승을 맞이하게 했는데, 서경 사람들이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길에서 저격하는 바람에 기병이 모두 죽고 낭장(郞將) 고용지(高勇之)14) 등 십여 명만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두경승이 가는 도중에 변고를 듣고 말을 달려 다시 성으로 들어가자, 서경 사람들이 쫓아 왔으나 잡지 못하고 전리(電吏)15)만 잡아 죽였다.
이경백과 두경승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경백을 소환한 후, 석린을 지서북로병마사(知西北路兵馬使)로 대신 임명하고, 두경승으로 하여금 처치사(處置使)를 겸임하게 조치했습니다.
금나라의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려는데 서경 군사들이 길을 차단했기 때문에 통과하지 못하게 되었다.
두경승이 사졸을 뽑아 기습해 적도들을 섬멸하자 왕이 그 공을 표창해 상장군·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승진시킨 후 곧바로 수태위(守太尉)·참지정사(叅知政事)·판리부사(判吏部事)·수국사(修國史)로 전임시켜 관리의 인사권을 장악하게 하니, 비록 왕의 측근일지라도 감히 그를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평장사(平章事)에 오른 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봉하고 칙명으로 화공(畵工) 이광필(李光弼)16)에게 초상을 그리게 했습니다.
이광필이 “초상화의 법식상 살아있는 분은 반신상만 그려야합니다.
”라고 하자 두경승이 노하여 몸체 전부를 그리게 하였습니다.
양부(兩府)와 문무 백관들이 그의 집으로 가서 하례했고, 중방(重房)의 여러 장수들도 축하연을 베풀었다.
술이 취하자 각자 악기를 잡았으며, 두경승은 노래하고 수사공(守司空) 정존실(鄭存實)17)은 소관(小管)18)을 불었다.
이의민(李義旼)이 노하여, “재상이란 사람들이 어찌 스스로 광대처럼 노래 부르고 피리를 부는가?”하며 꾸짖자 잔치를 끝내고 헤어졌다.
두경승은 글을 알지 못하였는데 당시 어떤 의원(醫員)이, 벽에다 자칭 ‘옥당인(玉堂人)’19)이라고 썼다.
어떤 사람이 이를 두고, “전쟁터의 장수가 지금 수국사(修國史)가 되었으니, 의원이 옥당인이 된들 그 어떠하리?”라고 조롱하니, 듣는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두경승이 동료들과 함께,“식목도감(式目都監)20)에 소장하고 있는 판안(判案)21)은 국가의 중요한 법전인데 그 순서가 뒤섞여 점점 참고하기 어려워지니 전반적으로 점검해 다시 베껴 써서 보관해야할 것입니다.
”하고 건의하자, 왕이 허락하였습니다.
또,“선대의 여러 공신들은 대업을 도와 나라를 안정시킨 공이 빼어났으니 관작을 추가함으로써 그들의 공적을 잊지 않고 있음을 과시해야 합니다.
”하고 건의하자, 왕이 쾌히 받아들여 모두에게 관작을 추증하고 또 공신녹권(功臣錄券)22)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내려주었다.
이의민과 함께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는데, 그 서열이 이의민의 위에 있자, 이의민이 중서성(中書省)에서 마구 욕을 퍼부었으나, 두경승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중서령(中書令)으로 올랐는데, 옛 제도에 3품 이상은 승진할 때마다 으례 사양하는 표문을 올리고, 왕은 조서를 내려 사양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다음 다시 감사하는 표문을 올리고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상례였다.
두경승이 혼잣말로, “속으로는 덥석 받고 싶으면서도 남의 붓을 빌어 겉으로 사양하는 척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못할 짓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연경궁(延慶宮)23)으로 처소를 옮길 때 ‘임금이 탄 수레 아래서 변란이 일어납니다.
’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았습니다.
그 때문에 왕을 호종하던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뿔뿔이 흩어져버렸으나, 두경승은 혼자 말고삐를 잡고 태연자약했습니다.
최충헌(崔忠獻)이 명종을 폐위시킬 음모를 꾸미고서 군사들을 큰 거리에 배치한 뒤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는 구실로 두경승을 불렀다.
두경승의 사위인 장군 유삼백(柳森栢)은 두려운 나머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으며, 두경승은 자연도(紫燕島 :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와 병합)에 유배되었고 유삼백의 아비 유득의(柳得義)24)는 남쪽 변방에 유배되었다.
두경승은 섬에 있으면서 울분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혹은, 두경승이 금붙이를 지니고 있었는데 노비가 그걸 훔치려고 몰래 독살했습니다고